본문 바로가기
한이료의 작가들

'47그룹'과 '토마스 만'을 신랄하게 비평한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by 한이료 2021. 5. 24.

'47그룹'과 '토마스 만'을 신랄하게 비평한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페터 한트케 (1942~ 현재)  
  • '페터 한트케' 의 47그룹 비판

페터 한트케는 1942년 오스트리아 케른덴 그리펜에서 태어났다. 그라츠 대학교 4학년에 재학중이던 1966년 처녀작 '말벌들(Die Hornissen)로 문단에 오르지만 이 때까지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 한국어 번역이 이뤄지지도 않았다.) 같은 해에 저명한 작가 그룹이었던 '47그룹'을 '서술불능'이라며 당돌하게 비판했다. 심지어 47그룹에 있는 192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토마스 만(Thomas Mann) 에 대해서는 "거들먹거리기나 하고 콧물 같은 문장을 쓰는 끔찍한 작가" 라고 쏘아붙이기까지 했다.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올린 작품은 소설이 아닌 희곡인데, 바로 1966년에 초연된 '관객모독'(Publikumsbeschimpfung)'이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판본은 2012년 번역된 민음사의 그것이다. 이후 희곡 '카스파르(1968)', 시집 '내부 세계와 외부세계의 내부세계 (1969)', '패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1970)', 등으로 시작해서, '아직도 폭풍(2010)등까지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본고에서는 두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두 작품 '관객모독'과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에 대해서 개략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 '페터 한트케'의 작품세계

1. 관객모독 (Publikumsbeschimpfung)

관객모독(1966년 초연) (민음사)  

: 페터의 작품 세계는 도전적이라고 할 만큼, 기괴하다. 그의 작품의 의미에 빠진 사람은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반면에 '이게 대체 뭐지?' 하는 의문을 자아내게 하는 부분도 존재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상(李箱) 작가의 작품을 볼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곤 한다. 그의 문학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형식과 관념 파괴'이다. 그는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그것들을 박살내는 데, 때로는 지루할 정도로 서사를 길게 늘여뜨리기도 하고, 급작스런 사건을 전개시키기도 한다.

'관객 모독'은 페터가 처음 상연을 제안했을 떄, '너무 전위적이며, 초현실적'이라는 평을 받아서 몇차례나 거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4명의 배우가 온화한 말에서 거친 욕설에 이르기까지(그러니까, 관객을 모독하기까지)의 순수한 언어로 이뤄진 '언어극'이기 때문이었다. '관객모독'은 서사랄 것이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여러분이 보았고 들었던 것은, 여러분이 보았고 들었던 것에 그쳐서는 안됐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던 것이 의미 있어야 했습니다.
( '관객모독' P50 )

관객모독은 실험적 언어극으로써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 데 의의가 있다. 개인적으로 극의 마지막 부분인 박수소리를 오히려 관객들에게 들려주는 장면이 가장 소름끼쳤던 것 같다.

2.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Die Angst des Tormanns beim Elfmeter)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관객모독에 비견될 정도로 기괴한 작품이다. 주인공인 블로흐는 골키퍼였다. 그는 공사장에서 인부로 일하고 있는데 어느날 직장 상사의 눈초리를 퇴사 신호로 받아들이면서 그의 방랑이 시작된다. 그는 이 과정 중에서 한 여자를 살해한다. 서사적으로는 아주 단순하지만 서술적으로는 전혀 다르다, 그는 그림 부호를 사용하는 등 여러 서술적인 특이점을 많이 가져왔다. 개인적으로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기민하지 못해서 해설을 참조했다.

  지난 19세기 문학의 주인공들은 이미 자본주의의 비인간화를 탄식하고, 신의 죽음과 인간성 상실을 못내 서러워하며, 분노에 찬 반항도 해 보고 영웅의 객기 같은 것도 부렸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블로흐의 모습을 보면 그 모든 것이 이제는 철 지난 유행가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 작품해설 P129)

작가는 자본주의의 기계화된 논리를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 '페터 한트케 ' 2019년 노벨문학상의 주인공이 되다.

2019년 페터가 노벨문학상에 선정되기 이전에 2004년 그의 이름이 노벨문학상 작가인 '엘프리데 옐리네크' 에 수상 연설에 언급된 적이 있다. 그는 "노벨문학상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페터 한트케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15년이 흘러서 페터는 '올가 토카르추크(태고의 시간)'과 함께 노벨문학상의 주인공이 된다. 노벨문학상 선정 위원회에서는 "독창적인 언어로 인간 경험의 섬세하고도 소외된 측면을 탐구한 영향력 있는 작품" 이라는 선정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세간은 반발로 떠들썩 해졌다. 그의 서술적으로 후술한 점과 더불어 유고내전 전범을 옹호한 부분에 대해서 끊임없이 많은 소리가 오갔다. .이에 스웨덴 한림원 측에서는 이렇게 밝힌다.

"이 상은 정치적 상이 아니라 문학상이다. 문학적이고 미학적인 기준을 바탕으로 선정했을 뿐이다."

이에 많은 소송이 오갔다고 전해진다. 노벨문학상 자격이 그에게 있는 지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


  • 작가 한트페트케에 대한 고찰

개인적으로 서사가 뭉게질 만큼 전위적인 문학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최초의 의미'를 담고 있다면 그 나름대로 의의는 있다고 생각한다. 페터 한트케는 형식을 깨 부수는 문학을 쓴다. 서사에 대해서는 뒷전이다. 모든 것을 부수고 난 뒤에 자리하는 것은 폭력의 희열과 분해된 조각만이 잔멸하게 편재할 뿐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의 문학을 찾아읽게 되는 건 왜일까. 그는 아마도 실험적인 정신으로 사람을 끄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독일어는 언어적이다. 그가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점을 미뤄보았을 때, 그의 출신은 그의 문학적 특질을 가지게 하는 양토가 되었을 것이다. 일반적인 이야기에 지쳐버린 이가 있다면 추천한다.